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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무딘 칼
 
수 경 시인 시산맥 회원   기사입력  2024/03/14 [19:50]

▲ 수 경 시인 시산맥 회원  © 울산광역매일

 이런 곰 같은 칼로 무슨 살림을 한다는 거니? 아이 답답해서 손으로 자르는 것이 낫겠다. 조서방은 칼도 안 갈아주고 뭐 한다니? 부엌에서 요리를 해 주며 칼을 사용하던 언니의 타박이 있었다. 친정엄마처럼 챙겨주는 언니이므로 웃음으로 넘길 말이었다. 언니네 집에는 늘 잘 갈아진 칼이 비치되어 있고 언니는 살림을 무척 잘한다. 물론 형부가 정기적으로 칼갈이를 해준다. 살림을 잘할 수 있도록 칼을 갈아주겠다는 형부의 말에 무딘 칼이 좋다며 거절했다. 나는 살림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칼을 갈아 언제든 무엇이든지 쓱싹, 식재료를 단칼에 흩어짐 없이 벨 수 있도록 준비해 놓지 않는다. 날렵한 칼은 날카로운 말言과 같다는 생각에 나는 무딘 칼을 좋아한다. 억지스러운 말 같지만 무딘 말처럼 무딘 칼은 생채기를 남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 집 주방 칼집에는 온통 무딘 칼뿐이다.

 

 어릴 적 집에는 숫돌이 있었다. 아버지는 농사일로 무뎌진 낫과 많이 사용한 부엌칼을 챙겨서 샘가로 갔다. 쪼그리고 앉아 칼과 낫을 갈곤 했고 나는 아버지의 반대편에 쪼그리고 앉아 그 장면을 보는 걸 좋아했다. 약간의 물을 숫돌과 낫이 맞닿은 지점에 끼얹는다. 낫을 숫돌 면에 대고 위아래로 번갈아 오르내린다. 아버지의 손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회색빛 숫돌물이 흘러나왔다. 재밌어 보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위험해 보이기도 했다. 마찰로 갈아진 낫을 허공에 들어 빛에 비추어 상태를 살핀다. 아직 멀었는지 다시 갈기 시작한다. 지켜보는 나도 팔에 힘이 들어간다. 쓱싹쓱싹 쓰으윽 싹 쓱싹쓱싹. 무딤에서 날렵함으로 마무리되어 감을 직감한 아버지는 손끝으로 낫의 날을 만진다. 살갗의 예민한 감각으로 완료되었음을 인지하고 나서야 아버지의 칼갈이와 낫 갈이는 끝이 났다. 잘 갈아졌나 실험하기 위해 풀을 벤다. 손에 힘 하나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풀은 두 동강이 났다. 단련된 칼로 대나무를 단칼에 베어내는 영화의 한 장면이 그려졌다. 날이 바짝 선 칼로 무와 감자를 썰고 생각을 자를 때 단숨에 잘리는 쾌감보다는 나의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이 싫었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그 이후로 무딘 칼을 선호하게 되었고 칼날이 말言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쓰는 언행에도 날이 있다. 칼처럼 무딤과 날카로움이 있다. 무딤은 격려와 칭찬의 말일 테고 날카로움은 비난이나 비아냥거림이 되겠다. 무딤은 둥근 말과 온화한 표정이고 날카로움은 상처 주는 말과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다. 본인은 무심결에 한 말이겠지만 상대방에게는 비수로 꽂히는 언행이 있다. 가끔 타인의 날 선 말로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덧난 상처는 오래도록 자존감을 추락하게 만들고 쉬이 아물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으로 내가 무심결로 뱉어낸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것은 아닌지. 그동안 내가 썰었던 날카로운 말들이 누군가의 가슴을 예리하게 베어냈는지 모른다. 되돌릴 수 있다면 나는 말을 무디게 좀 더 무디게 할 자신이 있다. 우리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결 같이 무딘 칼을 지적하지만 불편함 없이 살림하는 나를 신기해한다. 씀벅씀벅 썰어지는 식재료보다 뭉텅뭉텅 썰어지는 식재료에 정감이 간다. 혀를 찌르는 충고보다 고개를 끄덕끄덕 해주는 경청의 자세가 공감을 주듯 무디게 갈아지는 숫돌 하나 준비해 말을 간다. 둥글어지는 말이 되도록, 아버지가 쪼그리고 앉아 숫돌에 칼을 갈 듯 쓱쓱-쓰으윽, 쓱싹쓱싹. 하고자 하는 말이 무디게 잘 갈아졌는지 빛에 비춰본 후에 내뱉어야 무딘 말이 나올 것이다. 대화를 할 때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상처 주는 말은 자제될 것이다. 손에 힘이 들어가긴 하지만 나는 지금도 무딘 칼로 요리한다. 

 


 

 

2015년 선수필 겨울호 등단

2020 《시인광장》시 등단

시집 『딸기독화살개구리』

2023년 경기문화재단기금 수혜

jsk_k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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