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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
 
이성렬 시인   기사입력  2019/01/23 [17:11]

나직한 목소리로 옛집 자리는
그 동안의 내력을 얘기한다
양은집 키 큰 맏딸은
스물한 살에 시집가서
아들 둘을 낳았다
조신하던 옆집 노친네 딸은 이민 갔고
다리를 저는 그 동생 성훈은
늙은 부모를 두고 세상을 떴다
동갑내기 옥순은 아직
홀몸으로 기념품점 일을 하였고
집을 잃고 거리로 내몰렸던
포목점 외아들은 객지에서
이십오 년을 고생하다가
대학 선생이 되었다
고만고만한 사람들이 살던
변두리 시장 동네는 그러했다
태백에서 온 사나운 화차들이
검은 연탄공장을 드나들 때마다
세상은 몹시 흔들렸고
콘세트 시장 지붕에는 늘
자잘한 소원들이 묻어 있었다
미나리밭 실잠자리의 초록색 눈빛과
자정 무렵 식빵장수의 발소리
판자촌 구멍가게의 비닐창문과
동시상영하던 광무극장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전차길이 있던 자리에는
흰 차선이 길을 묻고 있다
아이들은 날마다 태어나서
시장골목을 메웠으며
시간은 계단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내 다락방이 있던 곳 침침한 공간에는
반찬투정하는 아이의 칭얼거림과
구식 라디오의 찍찍대는 소리가 묻어 있다
나는 시장 구석 골목에서
나의 나직한 부름에
메아리가 없음을 확인한다
그것은 슬프지도 안타깝지도 않은 것
다만 쓰린 상처를 쓰다듬으며
삶이 잠시라도 애잔할 수 있음을
노래하여 보는 것
일 년 후에 다시 올 것을 기약하며
나는 왕십리를 떠난다

 


 

 

▲ 이성렬 시인    

나의 어릴 적 기억은 왕십리부터 시작된다. 부친은 성수동 집을 팔고 왕십리종합시장에 포목점을 차리셨다. 철물점, 양품점, 식당 등등이 있었고, 나는 몸이 약하여 끼니때마다 <원기소>라는 고소한 알약을 씹어 먹고는 했다. 왕십리역에는 화차들이 많이 드나들었는데, 특히 밤에는 신호등의 붉은 빛과 푸른빛이 점멸하여 철길을 지나다닐 때에는 몹시 무서웠다. 상왕십리 쪽으로 나가면 끝머리에 광무극장이 있었다. 겨울날에 무쇠난로를 피워 놓은 광무극장에서 비 내리는 영화 두 편을 본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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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9/01/23 [17:11]   ⓒ 울산광역매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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