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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꽃비 내리는 경주에서
 
이상순 수필가 에세이 울산 동인   기사입력  2026/05/13 [16:54]

▲ 이상순 수필가 에세이 울산 동인     ©울산광역매일

꽃비 내리는 주말 경주박물관 커피숍에 앉았다. 따뜻한 커피잔을 들고 바라보는 풍경은 평온했다. 하지만 그 속에 천 년의 파문이 번졌다. 경주 서쪽 선도산 자락에 태종무열왕릉의 봉분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뒤로 두 개의 고분이 나란히 속삭이는 듯 자리 잡고 있었다. 

 

후일 무열왕으로 불리는 김춘추는 25대 진지왕의 손자다. 진지왕은 3년의 짧은 재위 기간을 뒤로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그의 손자 김춘추는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졌다. 김춘추 이전까지는 성골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27대 선덕여왕이 어느 봄날 반월성 월정교를 건어 경주 남산 자락 도당산에 올랐다. 그런데 남천 건너 아랫마을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왕이 연기의 정체를 묻자 옆에 있던 시종이 "김유신 장군이 아비를 알 수 없는 아이를 임신한 동생 문희가 가문의 수치라며 태워 죽이려고 쌓아 올린 장작에서 나오는 연기"라고 말했다. 

 

그 아비의 정체가 김춘추였음을 눈치챈 선덕여왕은 즉시 사람을 보내 화형을 멈추게 했고 둘의 혼인을 허락했다. 이때부터 가야의 왕족이었지만 신라에서는 존재감이 없었던 김유신과 왕족으로 태어났으나 왕권에서 멀어진 가문의 후손으로 살아야 하는 김춘추는 한배를 타게 됐다. 동시에 부부 모두가 왕족이어야 왕권 계승 자격을 갖던 성골 체계에서 어느 한쪽만 왕족이어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진골제도가 시작됐다. 이후 김춘추와 김유신은 처남 매부가 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데 큰 업적을 남긴다. 

 

28대 진덕여왕 이후 신라는 왕이 될 수 있는 성골은 한 명도 남지 않았다. 할아버지 진지왕이 죽은 후 90년이 지나 진골 출신 무열왕이 29대 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재위 기간 백제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의 외교를 주도하였으며 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업적을 남기고 경주 서쪽 `극락정토의 땅` 선도산으로 돌아갔다.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했을 때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은 당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다. 인문은 신라를 위해 당나라의 고급 정보를 수집하여 자장을 통해 고국으로 넘기면서 신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을 때 신라 사람들은 남천 옆 관음도량 인용사를 창건해 인문의 무사 귀환을 빌었다. 하지만 인문이 돌아오는 뱃길에서 사망하자 그의 명복을 비는 사찰로 바뀌었고 그 빈터가 영웅을 향한 그리움과 함께 비를 맞으며 고요히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에는 월성이 보이고, 남천은 천 년 전처럼 지금도 고요히 흐르고 있다.

 

월정교 너머 운무로 싸인 도당봉이 보인다. 벚꽃이 화려하게 핀 그 자리가 신라 화백회의가 열리던 장소이며, 왕이 즉위하면 의례를 올리고,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던 곳인 줄 그 누가 알겠는가. 

 

화백회의로 폐위된 할아버지 진지왕에 이어 화백회의를 통해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사실은 당시 신라의 역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다. 찬란한 왕권 뒤에 귀족들과의 합의와 견제 그리고 미묘한 균형 속에서의 천년 왕국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경우이기도 하다.

 

비에 젖은 창밖을 바라보며, 통일 이후 안전기로 접어든 신라의 시간을 떠올려 본다. 격동의 시기를 지나 정치와 문화가 꽃피던 시대, 그들의 숨결은 여전히 고요한 풍경 속 경주에 남아 있다. 이곳은 단지 유적의 집합이 아니라 천 년의 시간이 층층이 쌓여 역사를 만들었던 현장이고 지금도 그 역사는 흐르고 있다. 

 

꽃비는 역사 속 기억 위에 내려앉고, 전설 같은 이야기로 남아 오래도록 마음을 두드린다. 저 너머 서쪽 선도산에 잠들어 있는 김춘추와 김유신 그리고 김인문의 이야기는 기록과 설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삼국을 넘어 하나의 나라로 나아가던 격동의 시대, 세 사람의 선택과 결단은 한 시대를 건너는 영웅담으로 남았다. 

 

비에 젖은 산과 들은 그들의 이름을 크게 드러내지 않지만, 그래서 더 깊이 스며든다. 돌과 흙, 흩날리는 꽃잎 사이로 역사는 숨 쉬고 우리는 그 위를 스쳐 지나 간다. 비는 이미 그쳤고, 흐리던 하늘에 더 선명하게 보이는 선도산 봉분들 사이로 엷은 햇살이 번진다. 그 빛 속에서 오래된 시간은 역사가 되었고 현재가 되고, 천 년의 이야기 속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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