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얼 적다 하얗게 잠들었을까
글자는 제자리에 없었다
나는 의사처럼 몸을 굽혀
까마득한 문맥의 맥을 짚는다
스무 살 엄마는 문맹이었다
신혼방에서 글자가 삐뚤빼뚤 자리 잡기도 전에
아버지는 전장으로 떠났다
죽고 사는 소식이 우기를 지나 강을 건너는 동안
엄마는 봄을 그리며 보리 순을 피웠다
살얼음을 뚫고 찾아온 개나리처럼
아버지가 심은 글씨에서 싹이 나온 것처럼
외기러기 한 줄이 잿빛 하늘로 이어졌다
점점 멀어져 깜깜해진 줄
지뢰가 지천인 나라가 묘지인 줄 몰랐던 걸까
사이공 꾸이년, 서울 대전
뒤섞인 전보인 줄도 모르고
주소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티비에서는 월남전 다큐가 치열했다
비둘기는 사이공에서 맹호는 꾸이년에서
피 한 방울 없이 스며든 호주까지
불쑥,
전쟁 났다냐
코드를 뽑아버리면
역사도 오늘도 기억도 식은 구들장처럼 꺼지는 걸까
잊은 것이 더 많은 다음이거나 지금으로 시작하는
마침표 하나
봄에 내린 눈이 겨울까지 쌓였다
스무 살 치매꽃이었다
[ 시작노트 ]
이 시는 전쟁 속으로 들어간 한 사람을 따라가기보다, 남겨진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한다. 도착하지 않은 주소와 끝내 받지 못한 글자들, 그 공백을 진단하듯 문맥의 맥을 짚어보고 싶었다. 쓰여진 문장이 아니라, 끝내 쓰이지 못한 마음의 상태가 어디에 남아 있는지를 묻는 일에 가깝다.
글씨를 배우지 못했던 스무 살의 시간은 침묵이었지만 생존은 멈추지 않았다. 편지 대신 보리순을 심고 문장 대신 계절을 키웠다. 봄을 그릴 줄 알았던 손놀림은 문자 이전의 언어였고 언어 이전의 사랑이었다. 전장으로 떠난 사람과 뒤섞인 도시 이름들 사이에서 기억은 점점 외국어가 되었고 역사는 플러그 하나로 꺼질 수 있는 화면처럼 위태로워졌다.
기억을 복원하려 들기보다, 기억이 사라지는 방식을 따라간다. 무엇이 남았는가보다 무엇이 지워졌는지를 오래 바라보고 싶었다. 마지막에 놓인 ‘스무 살 치매꽃’은 개인의 병명이 아니라 전쟁과 이주, 침묵 속에서 너무 이르게 늙어버린 한 세대의 시간에 붙인 이름이다. 쓰기 위해서라기보다 확인하기 위해 적힌다. 잊힌 줄 알았던 것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ㆍ2017년 문학나무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ㆍ
ㆍ시집으로 『햇간장 달이는 시간』 『힐 엔드』가 이 있다.
ㆍ 재외동포문학상, 시드니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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