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낯섦이 익숙함으로 바뀌는 시간이다. 타지에서 6일을 넘기니 짐을 싸고 푸는 일마저 몸에 배었다. 공간을 옮기며, 몸과 마음도 새로운 리듬에 길들여지는 과정임을 여행을 통해 알 것 같다.
호도협 트레킹 때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던 옥룡설산은 이제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다. 산을 더 가까이에서 보기위해 운삼평으로 향했다. 여강은 사면에서 설산이 보인다. 산을 배경으로 웨딩 촬영을 하는 예비부부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웃음은 낯선 땅에서도 사랑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인연인지 말해주고 있다.
여강 시내를 지나는 차창 밖으로도 설산은 계속 따라왔다. 하얀 봉우리 하나가 마치 길을 안내하는 듯했다. 삭도 대합실에서 마주한 한글 표지판은 뜻밖의 친근함을 주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는 직원의 모습은 이곳이 또 다른 이국 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익숙함과 낯섦이 한 화면에 겹쳐지는 순간, 우리는 여행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
운삼평(雲杉平) 가문비나무 사이로 숲과 초원이 자리하고 있다. 구름이 노니는 평원이다. 나시족의 경전인 동파경에 따르면 이곳은 말 대신 호랑이를 타고, 소 대신 사슴으로 밭을 간다는 신화의 땅이다. `우무게` 사랑을 위해 죽는 거룩한 곳. 경전 속 옥룡 제3국은 옛날 아롱판이라는 남자와 구명금이라는 여자가 사랑의 도피처로 숨어들어왔던 곳이다. 이들이 사랑으로 살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나무판과 자물쇠들이 증거다. 많은 연인들이 이곳에서 웨딩 촬영을 하는 이유도 알 것 같다.
길은 목재 테크로만 이동이 가능하다. 설산이 보이는 운삼평을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지금은 케이블카로 훌쩍 올라왔지만 옛날에는 밀림을 뚫고 올라와서 본 이 평원에 사랑을 위하여 죽을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 식사 후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연출하였던 장예모(장이머우) 감독 작품으로 대자연인 옥룡설산을 배경으로 공연하는 인상여강 공연을 보았다. 해발 3,300m의 노천 무대, 500명의 출연진, 100필의 말. 그 숫자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무대에 선 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라 실제 삶을 살아가는 그곳의 소수민족들이라는 사실이다. 차마고도를 떠나는 마방, 가장을 떠나보낸 아낙네들의 삶. 거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인간의 이야기. 그 장면들은 공연이라기보다 그들의 생활처럼 느껴졌다. 차마고도 산길에서 잘 다니는 조랑말을 탄 배우들이 관객들로 가득 채워진 뒷좌석으로 달려오는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가족들의 만류에도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을 맺어준다는 옥룡설산으로 떠나는 여자가 어머니께 큰절을 올리고 남자와 함께 말을 타고 떠나는 장면은 뭉클했다. 무대 아래서는 여자의 오빠로 보이는 남자가 절규하며 뛰어나와 이생에서 이루지 못한 누이의 사랑이 저승에서는 이루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원하는 모습도 보인다.
장예모 감독 팀이 연출한 `인상` 시리즈 중 하나로 중국 정부와 공동으로 지역 관광지를 무대로 그 지역의 이야기들을 이용해 연출한 공연으로 계림 인상유삼저, 항주 인상서호, 무의산 인상대홍포, 여강 인상여강, 하이난 인상해남도, 주산 인상보타, 충칭 인상무륭 등이 있다.
인상여강 쇼는 소수민족의 일상생활과 결혼 풍습, 하늘과 땅에 제사 풍습, 지금까지 아무도 등반 할 수 없는 신비한 산 옥룡설산에 감사를 올리는 내용으로 옥룡설산과 하늘, 대지가 무대가 되는 거대한 규모의 공연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공연을 한다고 한다. 우리가 공연장을 떠난 뒤 억수같이 내렸다는 소식을 들으며, 여행에는 가끔씩 설명되지 않는 호의가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7일째, 나시족 전통 마을인 옥호촌과 백사마을을 찾았다. 옥호촌 지붕아래 매달린 쌍어(雙魚) 문양을 보며, 김해 김수로왕릉에서 보이는 신어문(神魚紋) 문양이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발견하는 순간, 인간의 삶이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궁금하다.
여강을 떠나는 버스 안에서 하교하는 아이를 기다리는 가족들이 보였다. 탈것은 오토바이, 또 조부모와 손을 잡은 그 모습은 우리 아이들이 학원버스를 타고 바쁘게 이동하는 풍경과 겹쳤다. 같은 `돌봄`이지만, 그 결은 조금 달랐다.
쿤밍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는 여섯 명이 한 칸에 앉았다. 타로점을 보고, 첫사랑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잘 알지 못했지만 금세 가까워졌다. 마치 학창 시절 수학여행처럼. 여행은 끝나가고 있었지만, 마음은 어딘가 더 넓어져 있다. 풍경을 보러 떠났다가, 사람을 보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