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이 노랗다.
은행잎은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길 위로 노란 잎을 추억처럼 쌓아간다. 시월이 다 가고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게 되는 계절의 달력이 노란 색칠을 한다.
스무 살이 조금 넘었던가. 손가락으로 꼽으며 세어야 알 것 같은 먼 옛날의 어느 시월이 생각난다. 나는 서울의 직장에서 남자친구는 춘천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휴일이라야 함께 하던 때다. 남자친구와 차가워진 바람을 피하며 햇볕이 드는 산골짜기에서 소꿉놀이처럼 점심을 지어 먹으며 하루를 보냈다.
언제나처럼 하루의 휴가는 짧다. 다음 휴일을 기약하고 서울로 가는 버스에 오른다. 헤어지는 버스 창가의 바람은 눈물이 나도록 시렸다. 차창 밖에 서 있는 사람이 흐려진다. 시려서 울었는지 서러워서 울었는지 아니면 언제나처럼 헤어짐의 의식이었는지 그렇게 차창에 눈물을 뿌리며 헤어졌다. 서울에 도착하고 시내버스를 갈아타며 눈물은 다 말랐다.
근무하는 대학병원의 입구에서부터 기숙사로 오르는 야트막한 언덕길은 굵다란 은행나무가 가로수이다. 노란 은행잎이 떨어져 수북하게 쌓이는 길을 오른다. 이제 다음 만날 날을 기다리며 마음이 설레이기 시작할 때인데 다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뚝뚝 떨구던 눈물은 급기야 어깨까지 들썩이며 통곡을 하기에 이른다. 한참을 이렇게 펑펑 눈물을 쏟다가 문득 제 정신이 든다.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울고 있지?’ 궁금하다. 눈물의 강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대면서 저 노랗게 지는 은행잎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날 그 시간에는 그 울음의 이유를 알 수가 없다.
다음 날 근무 시간에 병동으로 걸려온 남자친구의 전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 단음절의 목소리가 은행잎처럼 후두둑 떨어진다. 병석에 누워계시던 그의 어머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의 명의들도 두 손을 들고 집으로 돌려보내진 어머니다. 가슴이 쿵하고 놀라고 나서 다시 울음이 쏟아지려는데 어제 밤 그렇게나 울었던 그 시간이 떠오른다. ‘그랬구나. 그때 내 남자친구가 그리도 슬프게 울고 있었구나. 그래서 나는 이유도 모르는 울음을 그렇게나 울었구나.’ 당연히 그랬어야 했던 그 슬픔의 시간이 눈물로 풀어졌다. 그의 통곡은 멀고도 먼 길을 따라와 나도 함께 울어주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렇게 말로 표현하고 전달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을 텔레파시라고 한다던가. 우리는 살아가면서 간혹 그런 상황을 경험한다. 그것은 깊은 마음의 맺어짐이거나 풀어지지 않는 매듭으로 엮어진 영혼끼리 주고받는 것 같다.
그때 멀리에서나마 함께 울었던 그 남자친구는 아직도 내 곁에 남아 있다. 엊그제 서울에 있는 딸의 손녀를 보러 함께 다녀오는 길이다. 이제는 버스도 아니고 기차도 아니고 전철이다. 세상은 그렇게 많은 변화를 주어 마음도 굳어지고 단단해진 것 같다. 어지간한 사건에는 놀라지도 않고 웬만한 일들에는 변화도 없다. 잘 적응하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애써 위로하는 무뎌진 가슴이다.
전철 안 우리 곁에 서 있는 어떤 젊은 사람의 전화가 이어진다. 참으로 할 말도 많다. 들으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데 이어지는 그 남자의 수다는 끝이 없다.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의 요점은 없다. 그냥 상대방의 목소리가 끝이 날까봐 조급한 것 같다. 그렇게나 긴 시간 동안 전하는 말들은 아주 평범하고도 쓸데없기까지 한 이야기들이다. 그렇지만 무엇인가를 전해야 연결의 고리를 이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우리는 몇 번이나 말로 표현했을까? 그렇게 단어로 나열을 하지 않았어도 서로는 사랑하는지 보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전달자가 되어 준 기계의 역할이 아니더라도 예전에는 느낌으로 알 수 있었던 날이 있었다.
감정이 얇디얇은 젊은 날 이어서였을까? 하얀 창호지처럼 물들기 쉬운 종이 같았을까. 그래서 분홍빛만 보아도 얼굴이 붉어지고 굴러가는 나뭇잎만 보아도 웃음을 터트렸던 것일까? 파란 하늘을 보면 눈물이 솟던 그 때가 지금의 저 젊은이만한 때인 것 같다.
너무나 많은 도구와 기계가 문명이니 발전이니 하면서 감정을 무디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전화 한 통화 없이도 날아오던 슬픔의 노란나비 한 마리가 지금은 없다.
끝없이 확인하고 주지시키고 몇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이야기 끝을 맺지 못하는 젊은이의 목소리가 어설프다 못해 가엾다. 화살처럼 이 세상 을 날아다닐 수 있는 무선의 시대이기 때문일까. 눈빛 대신 이어지는 그들의 긴 이야기가 짜증스럽다.
그래서 그 옛날 이유를 모르고 울었던 가을날이 더 그리워지는 지도 모르겠다. 나도 전화를 켜고 그날 무언의 전달자가 되어 준 은행잎에게 말을 걸어야겠다.
“너는 왜 가을이면 잎으로 지느냐고.”
실없는 소리에 은행잎이 팔랑 웃으며 저만치 날아간다.
등단: 2012년 월간 수필문학 천료
저서: 사진 수필집 「두 번 울던 날」
수상: 제7회 백교문학상. 제15회 춘천여성문학상
활동: 한국문인. 강원수필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