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일세대가 겪는 일 중의 하나는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일이다. 그 중의 하나는 연장자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한국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학생이 교사를 부를 때나 부모님 같은 연배의 사람을 부를 때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곤 한다. 오히려 이름 대신에 “아저씨”라고 한다거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거리감을 느끼게 된다. 다른 하나의 과제는 언어의 장벽을 잘 넘어가는 훈련을 쌓는 일이다. 아주 간단한 인사말을 건네는 일이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는 일에도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들이 흔하다.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는 일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 적령기가 되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는 일도 이민 가족이 겪는 큰 어려움이다. 특히 문화, 언어, 음식을 같이 나누는 동족 배우자를 만나는 것은 큰 행운이다.
혜숙이가 이민을 온 것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다. 엘에이에 정착하기까지 온 가족은 하루하루 살얼음 위를 걷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부모님은 데리고 온 오 남매를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새벽부터 밤늦도록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자녀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있었던 일들을 듣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수업 시간이었지만 아이들은 그날 배운 과목에 대해서 들려주곤 했다. 자녀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부모님께 즐거움이었다
어느 날 혜숙이는 집에서 가까이 있는 도넛 가게에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았다. 미국인이 경영하는 가게에서 일을 하게 되어 영어도 배울 겸 용돈도 마련할 수 있어서 좋았다. 어린 딸이 일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님은 안쓰럽게 생각하면서도 무척 대견스러워했다. 이민 온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은 딸이 미국인 손님들을 맞이하면서 도넛을 팔기도 하고 매장을 지키는 것이 신기해 보였다. 혜숙이는 방과 후면 일터로 달려갔다. 미국인들과 대화하는 일이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조금씩 편하게 생각되었다. 어떤 때는 얼른 이해가 되지 못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미국인 손님들은 조금도 불편 해하지 않고 오히려 친절하게 대해주어 고마웠다. 매장에서 함께 일하는 매니저는 아주 친절하게 혜숙이를 도와주곤 했다. 손님이 묻는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면 얼른 다가와 설명해 주곤 했다. 무척 고마웠다. 매니저는 무척 성실하게 일을 했다. 혜숙이가 힘들어하면 곧 달려와 도와주었다.
부모님은 딸을 위해서 좋은 한국인 사위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좁은 이민 사회에서 마음에 드는 교포 청년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딸이 한국인 보이프렌드를 사귀기를 바랐지만 없었다. 어느 날 혜숙이는 매니저와 함께 부모님을 찾아왔다. 앞으로 결혼하기로 약속했다는 뜻밖의 소식도 전해주었다. 부모님은 며칠간 입맛을 잃었다. 그러나 대안이 없었다. 딸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혜숙이는 남매를 낳았다. 아들은 백인 아버지를 닮아 성실한 성품을 타고났고 딸은 어머니의 아름다운 모습을 쏙 때 닮았다. 혜숙이는 아이들이 우리말도 익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집에서는 우리말을 쓰곤 했다. 아이들도 제법 엄마의 말을 잘 알아듣고 따라 하기도 했다.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엄마와 주로 우리말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딸이 말했다. “엄마, 나 배고파” 완벽한 우리 말을 구사하는 딸의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할아버지는 외손녀딸이 “할아버지!” 하면서 달려와 안길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했다.
어느 화창한 봄날 아들을 데리고 교외의 산으로 소풍을 갔다. 숲속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아름다운 폭포가 시야에 들어왔다. 시원한 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장관에 아픈 다리의 통증이 사라지는 듯했다. 아들도 신이 나서 물거품이 출렁이는 바로 아래까지 달려갔다. 장관이었다. 높은 데서 쉼 없이 떨어지는 물 폭탄이 신기한 듯 아들은 두 손을 높이 들어 흔들었다.
“엄마! 폴(fall)이 너무나 맛있어요...”
큰 소리로 외쳤다. 혜숙이는 폭포수의 요란한 소리를 뚫고 귀에 들려오는 아들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어쩜 우리 아들이 우리 말을 저렇게도 잘할까? 우리 아들 최고다!”
폭포수의 아름다움을 음식의 맛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래, 그래. 맛있지? 엄마도 많이 맛있게 마시고 먹어서 지금 배가 불러요”
“아니, 아니요...”
아들은 의아한 듯 엄마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얼른 영어로 말해 주었다.
“Fall is so beautiful! (폭포가 너무나 멋있어요)”
순간 혜숙이는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마음은 즐거웠다. 맛있는 것이나 멋있는 것이나 좋다는 뜻은 마찬가지니까.
- 미국 오레곤주 유진시에서
약력: 전병두(수필가, 시인, 서북미문인협회 회원)
1995년 미국 오레곤주 유진시로 이민
2023년 상록수문학 수필 부문 신인상 수상
2023년 서북미문인협회 주최, 제19회 뿌리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2023년 제4회 타고르문학상 공모전
시부문 우수상, 수필부문 작품상
뿌리문학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