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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역 에세이> 지퍼의 톱날
 
이용희 시인   기사입력  2024/04/02 [16:45]

▲ 이용희 시인     ©울산광역매일

 등에 메는 가방의 작은 지퍼를 연다.

 

 빡빡하게 안 열린다. 장마철이라 이것도 수분 과다로 불었나 생각하며 다시 열려고 힘을 준다. 이제는 꿈쩍도 않는다. 급한 성질을 누르고 가만히 살펴본다. 역기 지퍼가 외부의 천까지 물고 있다. 그러면 그렇지 멀쩡하던 것이 갑자기 이상이 왔다면 그 자체가 이상일 텐데 다행이다.

 

 지퍼의 쇠 조각들은 서로의 입을 양쪽에서 지그재그로 맞추어야 한다. 오른쪽에서 하나 내리면 왼쪽에서 또 하나 끼워서 서로의 이틀이 가지런히 맞아 들어가야 잠기는 생리를 가졌다. 그런데 이 사고는 쓸데없이 제 톱니로 위의 천까지 물고 나서기에 일어난 일이다. 

 

 나의 일 나의 생각 나의 일상이 누구에겐가 영향을 주는 일이 있다면 이처럼 쓸데없이 불미스러운 결과를 낳을 것만 같다. 잘못 물었던 지퍼에서 가만 가만 물렸던 천을 잡아 빼고 나니 스르륵 잘 아물려 지퍼 본연의 자세가 되었다. 가방에서 꺼내려던 물건을 꺼내놓고 앉는다.

 

 마침 수필 동아리 문우들의 글을 정리하려던 참이어서 생각은 이 지퍼의 톱니처럼 어제 있었던 동아리 모임을 떠올린다.

 

 동아리 모임의 특성상 누구의 지도는 없다. 본인이 글을 발표하면 그 글에 대한 감상과 느낌을 나누게 된다. 어느 문우의 글은 어떻고 어느 문우의 생각은 어떻다고 평을 하기에는 서로가 가까운 사람들이다. 어디에선가 들은 이야기다.

 

 “다시 안 볼 사람이야?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그런 소리를 내 뱉는 걸 보면 다시는 안 보겠다는 생각이 분명하지. 다시 볼 사람이 그렇게 이야기 하겠어?”

 

 이렇듯 참 말이란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내 뱉기가 쉽지 않다. 얼렁뚱땅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거나 사탕발림 단어로 버무리거나 아예 입을 꾹 다물거나 셋 중의 하나다. 무엇인가 지적을 당한다는 것은 불쾌 그 자체이기에 어려운 역할을 하려는 사람은 없어서 언제나 순조롭다. 마치 지퍼가 천까지 물어들이지 않고 제 길만 살그머니 밟아가듯 지나간다.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을 때 나눌 수 있는 ‘좋아요’. ‘참 부드러워요.’ ‘술술 잘 읽히네.’ ‘소재는 가벼운데 내용은 깊어요.’ 등 등 으로 때우고 돌아서는 동아리 모임이 어제도 있었다. 언제나처럼 글의 구성이나 작법과는 무관한 글 속의 식물이야기나 지명을 들추어서 화제를 벌였다. 

 

 또한 지구 저 건너편으로 여행을 가고 없는 어느 구성원이 보내온 글을 읽고 좋은 세상이라며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이렇듯 목적이 되는 합평과는 무관할 것 같은 대화들로 시간은 가고 동아리의 또 한 페이지는 장식되었는데 지퍼의 톱날에 물려있는 천 조각이 없어서인지 돌아오는 길은 가볍기만 하다. 

 

 얼마나 가까워지면 속내를 다 이야기 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막역한 사이가 되면 섭섭한 이야기를 듣고도 따듯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내 곁을 떠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자식들에게도 나는 할 말을 아낄 때가 많다. 내 어머니는 나에게 하시고 싶은 이야기를 다 하시고 살다 가셨을까. 

 

 나 스스로를 비평하고 자책할 때에도 그 무기를 고르고 강약을 조절했음을 느낀다. 무엇이든 존재한다는 것은 소중하다. 이처럼 우리 동아리들의 시간에 함께 하는 각자의 작품도 부족하거나 넘치거나 그 존재만으로 아름다움의 결정체가 아닐까? 

 

 내게는 가깝고 허물이 없다고 어느 지인의 띄어쓰기를 고쳐주고 길게 늘어진 문장을 싹뚝싹뚝 가위로 잘라주었던 철없던 내가 생각나서 부끄럽다. 이제 절대로 내가 걸어야 할 나의 길이 아니라면 지퍼의 톱날로 곁의 천을 잡아당기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는데 동아리 문우의 카톡이다. 

 

 “바쁘시겠지만 제 글 읽어보고 피드백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덮여 있는 천 조각은 씹지 않으려고 살금살금 나의 길을 맞추는 지퍼의 톱날이 된다. 누구에게나 내가 맞추어야 할 내 짝은 존재하고 그 일이 최상임을 알면서도 비죽이 고개를 내밀어 타인의 길을 밟아보는 일을 호기심이라고 한다. 그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나는 또 모든 문을 열어 놓고 타인의 작품들을 넘겨다본다.

 

 어느 작품을 대하던 모두 다른 일과 다른 생각과 다른 목적으로 다른 길을 살아가지만 하나같이 아름답고 특별하고 소중하다. 입은 지퍼처럼 꼭 닫지만 마음은 활짝 열고 두 손으로는 모두를 토닥이고 응원해야지 생각하니 내 길만 또박또박 걸어가 두 줄을 한 줄로 완성하는 지퍼의 길도 지루하거나 답답하지는 않을 것만 같다. 

 


 

 

2012 월간 수필문학으로 등단

아동문학. 시인. 시조시인

수상: 춘천여성문학상. 강원아동문학상. 전국여성환경백일장 장원. 백교문학상등 다수

저서: 사진 수필집 ‘두 번 울던 날 ’외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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